그때 목판본이 원형대로 잘 보존되여 귀한 민속자료로 지방유형문화재 제168호로 지정되여 덕정동 추원당에 보관 되었다.
1977년에 병진 丙辰에 대동보가 발간되고 1998년 무인戊寅에 8파의 파보 등이 발간되었다.
2015년 을미보乙未譜는 대동보 보책과 전자족보인 CD와 인터넷( Intermat )족보 및 모바일(Mobile) 등 획기적인 현대적인 족보를 발간 하였다.
한천동 영모당, 덕정동 추원당, 연동은 해남윤씨 삼대 유적지로 자리잡고있다.
한편으로 군동면 화방리, 도암면 항촌리,군동면 덕촌리,도암면 동령리 등지에 해남윤씨 세장비 世莊碑등이 세워져 있어서 오랜 세거지 인 것을 알 수 있다.
지명유래와 변천
해남윤씨 영모당(永慕堂)이 위치한 곳은 한천동(寒泉洞)이라 부른다.
들목의 연지(蓮池)에서 보면, 낮은 구릉성 산과도 같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영모당이 무척 아늑해 보인다. 낮은 산자락 사이의 지형이 사람의 마음을 더 따뜻하게 하고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풍경이다. 이곳 연못 옆에는 오래전부터 명천名泉이 있어 ‘참샘’이라 불렀다. 한천동 앞 도로가 정비되기 전까지는 고갯마루인 이곳에 주막 같은 집이 있어 행인들이 시원한 샘물로 목을 축이며 잠시 쉬어 가기도 했다.
영모당이 있는 오늘날의 계라리(桂羅里)는 계산(桂山), 귀라(貴羅), 천동(泉洞) 세마을이 합해져 부르게 된 합성지명이다. 1914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이다. 계산(桂山)의 계(桂)와 귀라(貴羅)의 라(羅)에서 한글자씩 따 귀라리라 한 것이다. 천동(泉洞)의 글자는 “귀라리”라는 이름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강진지역에서 보면 오랜 유서가 있는 지명이다. 천동은 한천동(寒泉洞)이라고도 불렀다. 이런 연고로 영모당은 “한천동재각”으로도 부른다. 실제로 1813년 중수 때의 상량문은 글의 제목을 “한천동재각중수상량문(寒泉洞齋閣)重修上樑文)”이라 하였다. 한천동은 “덕정동”(강진), “백련동”(해남)과 함께 해남윤씨 세거지(世居地) 가운데 한 곳이다. 덕정동에는 추원당, 백련동에는 녹우당(국가지정문화재 사적)이 있다.
영모당이 있는 “천동리(泉洞里)”는 『호구총수(戶口總數)』(1789년, 규장각 소장)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이 책은 전국의 군현별로 면별 리촌(里村) 지명을 처음으로 기록한 관찬 지리지이다. 여기에 실린 마을은 말 그대로 전통마을이라 할 것이다. 그만큼 “천동” 지명은 오랜 유서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1872년 「강진현지도(康津縣地圖)」에서도 천동리는 뚜렷하게 표기되고 있다.
조선후기 천동리는 파지대면(波之大面)에 속했다. 파지대면은 파대면(波大面)으로도 썼다. 1914년에 백도면(白道面)과 보암면(寶巖面), 파지대면(波之大面) 세면이 합해져 도암면(道巖面)이 된다. 영모당이 소재한 파지대면 천동리는 도암면 귀라리 천동이 된다.
지명유래와 변천
해남윤씨 추원당(追遠堂)이 위치한 곳은 덕정동(德井洞)이라 부른다. 그리 크지도 높지도 않은 작은 산을 배경으로 골짜기 여기 저기에 묘역과 재각들이 자리잡고 있다. 덕정동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해남윤씨세천(海南尹氏世阡) 빗돌이 당당하다. 추원당(追遠堂) 입로에는 인공적으로 조영한 연못이 있다. 이곳도 풍수 원리가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추원당은 덕정동의 중심 재각이라 할만하다. 윤효정의 조부인 윤사보(尹思甫)와 아버지 윤경(尹耕)을 모시고 있다. 규모나 건립 연대 등에 있어서도 앞선다.
추원당이 있는 오늘날의 강정리(江亭里)는 덕정(德井), 강성(江城), 산정(山亭) 세마을이 합해져 부르게 된 지명이다. 1914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이다. 세 마을 가운데 “덕정(德井)”의 땅이름이 그대로 “덕정리(德井里)”가 된 것이다. 보통 두 마을의 글자를 한 글자씩 따서 붙이는데 이곳은 “덕정”이 그대로 대표 지명이 된다. 그만큼 사람이 많이 살았거나 덕정의 사람들이 주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추원당의 유서가 된 해남윤씨들의 세거지가 그 영향력을 드러낸 듯싶다. 이런 탓에 추원당은 “덕정동재각”으로도 부른다. 덕정동은 “한천동”(강진), “백련동”(해남)과 함께 해남윤씨 세거지(世居地) 가운데 한 곳이다. 한천동에는 영모당(전라남도 민속문화재), 백련동에는 녹우당(국가지정문화재 사적)이 있다.
추원당이 있는 “덕정리(德井里)”는 『호구총수(戶口總數)』(1789년, 규장각 소장)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이 책은 전국의 군현별로 면별 리촌(里村) 지명을 처음으로 기록한 관찬 지리지이다. 여기에 실린 마을은 말 그대로 전통마을이라 할 것이다. 그만큼 “덕정리(德井里)” 지명은 오랜 유서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조선후기 덕정리는 파지대면(波之大面)에 속했다. 파지대면은 파대면(波大面)으로도 썼다. 1914년에 백도면(白道面)과 보암면(寶巖面), 파지대면(波之大面) 세면이 합해져 도암면(道巖面)이 된다. 추원당이 소재한 파지대면 덕정리는 도암면 강정리 덕정이 된다.
지명유래와 변천
백연동은 해남군 해남읍 연동으로 어초은께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시고 세거지로서 기반을 다지고 행랑녹우당과 안채 등은 사대부집의 대표적인 가옥으로 사적 제167호로 지정 국가가 관리한다. 고택 아래에 유물전시관이 있어 육백여점의 유물을 국가에서 관리사무소를 지어 관리하고있다. 주변에 천년기념물 제241호로 지정된 비자나무, 은행나무, 노송 들이 있다.어초은공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없는 사람들의 세금도 대납 하셨다. 이와 같은 일을 세 번이나 하여서 옥문을 열어 주는 삼개옥문적선지가 三開獄門積善之家 로 칭송 받고 있다.